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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찐’한 인터뷰∥
영원한 LG 트윈스 맨 박용택
LG에 몸·마음 다 바쳐 진짜 충성
선수시절 점수 99점 인간미로 1점 빼
최악 2008년 이겨낸건 ‘가장’ 책임감
2013년 11년만에 PS 나가 눈물 펑펑
야구 자체가 재밌던적 한번도 없어
늘 플랜A부터 D까지 계획속에 살아
하지만 티끌만큼도 후회없이 해냈다
은퇴 아쉬워하는 댓글엔 또 ‘울보택’
LG 트윈스 박용택이 10월28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유니폼에 스며들었던 땀은 이제 다 말랐다. 길게만 보였던 선수의 시간이 이제 끝나간다. 잠실구장 3루측 라커룸의 짐은 아직 하나도 못 뺐다. “티끌만큼도 후회 없이” 선수생활을 해서 “더없이 후련”하기까지 한데 19년간 한몸이던 유니폼을 들고 잠실야구장 밖으로 나올 용기는 차마 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순간을 위해 마지막 눈물을 아끼고 있는 것도 같다. 마지막 경기까지 마쳤는데, 마지막 타석에도 섰는데 짐은 2~3개월 쯤 뒤에 빼고 싶단다. 아직은, 야구를 놓는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영원한 ‘엘지(LG)의 심장’, 박용택(41)의 야구 이야기를 희로애락으로 풀어본다.
희(喜): 우선 지명, 기뻤다 실업농구팀 선수였던 아버지의 운동신경과 “10년에 한 번 기침할 정도”로 건강한 어머니의 체력을 물려받아 어릴 적부터 운동을 곧잘 했다. 농담 섞어 “축구선수였다면 2002 월드컵에 뛰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휘문고 3학년이던 1998년 엘지 트윈스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다. 야구를 좋아할 때부터 엘지의 팬이었고 늘 “저 팀에서 야구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있었기에 지명됐을 당시 뛸 듯이 좋아했다. 당시 선택지는 비록 대학(고려대)이었으나 졸업 후(2002년) 그는 꿈에 그리던 엘지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원 클럽 맨’이 됐다. 선수 생활 동안 엘지 감독은 8명이나 스쳐갔지만 그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정규리그 막판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박용택은 “엘지에서 선수로 할 만큼 다 했다. 몸, 마음 다 바쳐서 진짜 충성을 다했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 시절에 대한 점수도 아주 후하게 “99점”을 준다. “1점은 인간미로 남겨둔다”면서 껄껄 웃는 그의 얼굴 너머로 아련함이 묻어난다. 그는 우승 반지 없이 그라운드를 떠난다. 33번 등 번호는 물론 팀의 (영구) 결번으로 남겠지만.
LG 트윈스 박용택이 지난 10월28일 오후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로(怒): 슬럼프, 화가 났다 2008년은 지독히도 풀리지 않는 해였다. 한계를 느끼면서 “다 놔버린” 해였다. 자신에게 처음 실망한 해이기도 했다. “어느 순간 부상조차도 핑계를 대고 있던” 그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포기하고자 하는 모습에 더 화가 났던” 해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2군도 가봤다. 당연히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타율 0.257. 데뷔 후 처음으로 100경기도 못 뛰면서 세 자릿수 안타를 치지 못했다. 그즈음, 외부 자유계약선수(FA) 영입 등으로 외야 붙박이 자리가 위협받았다. 자존감에 생채기가 났다. “2009년 예상 라인업에 제가 없었어요. 바닥을 찍었더니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었죠. 가장인데 그렇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마음을 다잡고 개인 연습을 하는데 “느낌이 너무 좋았다.” 야구에 슬슬 자신감이 붙었고 그해 타율 1위(0.372)로 우뚝 서며 반등했다. 2009년은 그렇게 그의 야구 인생 터닝 포인트가 됐다. ‘야구의 맛’을 알게 되니 야구를 허투루 대할 수는 없었다. 책임감도 저절로 따라왔다. “최선을 다하자”는 어릴 적 가훈이었다.
LG 트윈스 박용택이 5일 열린 2020 KBO리그 준플레이오프 2차전 8회말 무사 1루 타석에서 3루수 파울 뜬공으로 물러난 뒤 허탈해 하고 있다. 연합뉴스
애(哀): 눈물, 흘릴 만큼 흘렸다 그처럼 눈물 많은 선수가 있을까. 별명조차 ‘울보택’이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경기에 지고 “억울해서” 펑펑 울었다. 프로 선수가 된 뒤로는 팀 선배들이 은퇴할 때마다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2013년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극적으로 2위를 하면서 11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을 때는 아예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미친 듯이 눈물을 쏟아냈다. 형님 같던 김기태 당시 감독과 이병규, 정성훈, 이진영 등 선후배 동기들과 일궈낸 기적 같은 2위라서 더 감격스러웠다. 드라마, 영화는 물론이고 요즘은 팬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을 보고도 운다. 그의 은퇴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글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이 난다. “울고 나면 마음이 비워져서 후련해지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그런 그가 5일 두산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끝난 뒤에는 울지 않았다. 그때가 선수로서 마지막 경기, 마지막 타석이었는데도 말이다. 8회 말 무사 1루에서 3루수 파울 뜬공으로 물러난 뒤 그저 헛웃음만 났다. “후회하지 않으려고” 상대 투수 이영하의 빠른 공, 퀵 모션 등을 머릿속에 그리고 ‘타이밍 늦으면 안된다’고 거듭 되뇌면서 타석에 섰는데 아뿔싸. 타이밍이 늦어버렸다. “순간 ‘아이고, 이놈아’ 했다.” 그 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LG 트윈스 박용택이 5일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2020 KBO리그 준플레이오프 2차전 경기를 마친 뒤 팀 후배 김현수를 안아주고 있다. 이날이 박용택의 선수 마지막 경기였다. 연합뉴스
락(樂): 야구, 즐긴 적은 없다 사실 “야구 자체가 재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나마 올 시즌에는 끝이 보이는 길을 걷다보니 즐거웠던 듯도 하다. 야구는 늘 그에게 매일 노력해야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열심히 하는 것만이 노력이 아니었다. “조일 때 조이고, 풀 때 푸는 세밀한 노력”이 필요했다. “기분 좋은 긴장감이 느껴지는 날, 그날이 제일 컨디션이 좋아서” 그 기분을 맞추려 부단히도 애썼다. 경기 전 30분 쪽잠은 필수. 늘 플랜 에이(A)부터 디(D)까지 짜며 계획 안에서 살던 그였다. 이런 수고 덕에 그는 통산 2504개의 안타를 때려냈다. 케이비오(KBO)리그 최고 기록이다. 2236경기 출장도 마찬가지. 그의 성실함이 기록으로 보인다. 통산 타율은 0.308. “더는 미련은 없다”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11월25일이면 그의 선수 인생 마지막 월급이 들어온다. 공교롭게도 한국시리즈 7차전이 예정된 날이다. 그는 진짜 그날까지 그라운드에 있고 싶었다. 하지만 엘지의 2020 가을야구는 너무나 짧게 끝나버렸다.
그리고, 박용택은 지금 아프다. 허리, 어깨, 손목, 팔꿈치 안 아픈 곳이 없다. “온 몸에 염증이 확 퍼진 느낌”이라고 했다. 그동안 참고 견뎌왔던, 혹은 잊고 있던 통증들이 봉인 해제된 느낌이랄까. 선수 시절 그는 매일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에게 말해왔다. “넌 잘 하고 있어.” 이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용택아, 참 잘 견뎠어”라고. 김양희 기자
whizzer4@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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